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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뻔뻔하게 남긴 '위안부' 기록물

교육 이슈

by 라이프톡 2020. 6. 1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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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이시원이 위안부의 실태에 분노했다.
 

9일 방송된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KBS 발굴 영상 기획으로 `전쟁 포로가 된 만삭의 `위안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5월 KBS에서는 박영심 할머니가 난징위안소를 탈출해 중국 원정군에 구출되는 과정이 담긴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 영상 속의 만삭의 박영심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체포돼 연합군의 포로가 됐다.  
 

이시원은 "위안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진이 만삭의 위안부 사진인데 사진의 주인공인 그 분의 영상을 발굴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라고 영상을 본 소감을 밝혔다.  
 
 

(사진출처=ⓒKBS)


다니엘 린데만도 "만세를 외쳤을 때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포로가 됐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라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전쟁 포로가 된 이유를 물었다.  

 
소현숙 교수는 "전쟁이 끝나도 위안부 여성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쏭산에서 연합군과 일본군의 접전이 이뤄졌는데 이 여성들이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멀리 가게 됐고 종전을 맞았을 때 이 여성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언급했다.  
 

김지윤 박사는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마지막에 휴전 협상이 지체된 것은 포로 문제 떄문이다. 포로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라며 "위안부 피해자 같은 경우는 글려간 피해자임에도 일본군이 관리하고 있었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위안부는 적국의 포로였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1918년에 시베리아에 출전한 일본은 성병에 감염된 부상병들이 많았다. 이런 일이 다시 있으면 안되겠다,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중일전쟁 이후 군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했다. 당시에는 혁신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라며 위안부가 세워진 계기를 밝혔다.
 

손 교수는 "초창기에는 결국 조선 여성들까지 동원하게 됐다"며 "아소 데쓰오의 보고서에 따르면 `피검자들은 반도의 여자(조선인) 80여 명, 내지 여자(일본인) 20명으로서 반도인 중에서 화류병이 의심되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라고 적혀 있으며 한국의 어린 여성들이 위안부로서 최적화 돼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이시원은 "위안부라는게 진짜 전쟁범죄와 성범죄가 동시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 것을 뻔뻔하게 기록까지 했다는 것이 말이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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