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1,000만 원 벌던 약품 도매업자, 42세 늦깎이 대학생 거쳐 지역 1위 장례식장 주인 된 비결
의약분업으로 사업 실패를 겪은 뒤 42세에 장례지도사가 된 박창덕 씨가 폐업 위기의 장례식장을 인수해 3년 만에 지역 1위로 키워낸 반전의 인생사를 전한다.
한때 월 1,000만 원의 수익을 올리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약품 도매업자가 있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사업을 운영했던 박창덕 씨의 이야기다. 하지만 2000년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사업은 급격히 어려워졌고, 그는 결국 사업을 그만두어야 했다. 인생의 전환점은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찾아왔다. 아내의 권유로 장례지도학과에 진학하며 '03학번 늦깎이 대학생'으로서 새로운 인생 2막을 설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서웠지만 도전했다" 42세에 시작한 늦깎이 공부와 스카우트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박 씨는 영상에서 "막상 입학하려고 하니 너무 무서웠다"며 당시의 심경을 고백했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마주해야 한다는 직업적 특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를 용기 있게 만든 것은 아내였다. 아내의 응원에 힘입어 입학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했다. 학점 4.5 만점에 4.0을 기록할 정도로 학업에 매진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졸업하기도 전인 대학교 3학년 1학기 때 이미 대형 장례식장의 총괄 팀장으로 스카우트되었다. 보통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사업가 출신이었던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장례지도사로서의 전문성을 쌓기 시작했다.
죽음의 징크스 딛고 폐업 위기 장례식장을 지역 1위로
장례지도사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중, 박 씨에게 한 통의 의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장례식장을 인수하라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해당 장례식장은 전임 창업주와 두 번째 대표가 모두 57세에 세상을 떠난 '죽음의 징크스'가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폐업 직전의 악조건까지 갖춘 상태였다. 박 씨 역시 제안을 받았을 당시 나이가 57세였기에 망설임이 컸다.
결정적인 순간 다시 한번 힘을 준 것은 아내였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내의 말에 그는 과감히 인수를 결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지역 매출 꼴찌였던 장례식장은 운영 2년 만에 정상 궤도에 올랐고, 3년 만에 지역 매출 1위를 기록하며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박 씨는 차별화된 서비스로 승부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장례식장 대표가 화장장까지 동행하며 안치 단계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올인원(All-in-one)'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의족이 없는 고인을 위해 임시 의족을 만들어 입관을 돕는 등 고인과 유가족을 향한 진심 어린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진심은 고객들의 신뢰로 이어졌고, 이는 곧 사업의 성공으로 직결되었다.
"백억이 있어도 제때 못 쓰면 부질없다" 은퇴 후 동물들의 수호천사로
성공적인 운영을 이어가던 박 씨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죽음'을 마주하며 얻은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이들이 남기는 유서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고 전했다. 영상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너무 바쁘게 살아왔다"며 인생을 더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남긴다고 한다.
"백억이 있든 천억이 있든, 제때 쓰지 못하고 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목격한 그는 남은 여생을 즐겁게 살기로 결심했다. 현재 그는 약 3만 평의 땅 중 7천 평을 동물들의 보금자리로 내어주고, 버려진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경주마 출신의 말, 미어캣, 유기견 등 인간에게 상처받은 동물들을 돌보며 그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여생을 함께 동행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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