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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은 잘하는데 의견은 뭐야?" AI 시대, 한 우물만 파던 전문가가 위태로운 이유

안경을 쓴 남성이 마이크가 설치된 스튜디오 의자에 앉아 있다.

문세영
입력 2026.09.21 11:10
"요약은 잘하는데 의견은 뭐야?" AI 시대, 한 우물만 파던 전문가가 위태로운 이유
▲ 안경을 쓴 남성이 마이크가 설치된 스튜디오 의자에 앉아 있다.

과거에는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지식을 쌓아 정답을 내놓는 '전문가'가 대접받는 시대였다. 하지만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며 상황이 급변했다. 챗GPT나 제미나이, 클로드 같은 AI는 단 몇 초, 혹은 1초 만에 아주 전문적인 지식을 쏟아낸다. 이제 산업화 시대의 유물인 '한 우물 파기'식 전문성은 그 가치가 제로에 수렴할 위기에 처했다.

세바시 강연 Sebasi Talk 영상에 따르면, 인류학자 출신 경영인인 백영재 작가는 AI 시대의 커리어 변화를 거스를 수 없는 '메가 트렌드'로 규정한다. 그는 "AI 시대에는 하나의 산업군이 5년에서 10년 안에 생기고 사라질 것"이라며, 개인의 커리어 수명이 30~40년임을 고려할 때 "적어도 네다섯 번은 산업군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개인이 원치 않더라도 생존을 위해 산업군을 바꿔야만 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올 것임을 시사한다.

"요약은 잘하지만 의견은 없다"는 충격, 경계인으로 거듭나다

백 작가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통해 '경계인'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과거 한국 교육 시스템에 잘 적응했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미국 유학 시절, 에세이를 제출한 후 교수로부터 받은 피드백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Great summary, but what is your opinion?(요약은 너무 잘했는데,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두 줄의 코멘트였다. 정답을 외우고 정보를 요약하는 데 능숙했던 그에게 이는 돌로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는 인류학 박사 학위 취득 후 교수직을 희망했으나, 지원한 20여 곳의 대학에서 모두 낙방했다. 그는 이 시기를 스스로의 '한 살'이라 부르며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이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그 과정이 스스로를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결국 그는 인류학적 관점을 비즈니스에 접목해 경영 컨설팅 분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인류학자가 비즈니스 세계에서 하는 일이 경영 컨설팅과 닮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3개월 동안 두 페이지 분량으로 정리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결과 맥킨지에 입사할 수 있었고, 이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한국 대표를 거쳐 필립 모리스에서 근무하는 등 다양한 산업을 넘나들었다. 그는 경계인을 "서로 다른 문화나 사회 집단의 경계에 위치하며 어느 한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AI는 온라인에 이미 존재하는 '죽어있는 데이터'를 확률적으로 조합해 답을 내놓지만, 경계인은 낯선 세계로 넘어가 맥락을 읽고 서로 다른 경험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이어붙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즉, 정답 밖에서 새로운 질문과 관점을 만들어내는 '연결 능력'이 진짜 생존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AI가 따라 할 수 없는 핵심 역량, 'MARGIN'

백 작가는 33명의 경계인을 심층 인터뷰하여 그들의 공통적인 핵심 역량을 다섯 가지 키워드인 'MARGIN'으로 정리했다. AI 시대에도 살아남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M(Metacognition, 메타인지)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모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다. 둘째, A(Adaptability, 적응력)이다. 새로운 분야에 진입했을 때 과거의 성공 방식을 버리는 '탈학습(Unlearning)'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리러닝(Re-learning)' 능력을 의미한다. 셋째, R(Risk-taking, 리스크 테이킹)이다. 이는 영화처럼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타격이 크지 않은 '감당할 만한 리스크'를 선택하는 능력이다. 넷째, G(Generative Innovation, 생성적 혁신)이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분야를 연결해 기존의 것을 약 3% 정도만 뒤틀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연습이다. 마지막으로 N(Novelty Seeking, 호기심)이다. 새로운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테스트하는 근본적인 동력이다.

그는 실제 사례로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의 허명행 감독을 언급했다. 스턴트맨 출신에서 무술 감독을 거쳐 천만 감독이 된 허 감독은 마동석 배우의 대역을 많이 했던 인물이다. 백 작가는 허 감독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아는 뛰어난 메타인지를 가졌으며, 다섯 가지 역량을 모두 갖춘 경계인의 전형이라고 설명했다. 허 감독 또한 인터뷰 과정에서 "보통 이런 얘기를 남에게 잘 안 하는데 오늘 어떻게 다 하게 되네요"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한 우물만 파더라도 '연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경계를 넘나들며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백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특정 분야가 너무 좋고 그 안에서 전문성을 쌓고 싶은 사람도 충분히 그 삶을 살 수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한 우물만 파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우물을 파고 이를 연결할 수 있는 '파이(π)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물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로 늘어나며 가로로 연결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커리어가 인류학, 컨설팅, 담배 산업 등 이질적인 분야를 넘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단계마다 명확한 연결고리가 있었다고 강조한다. 새로운 분야로 넘어갈 때 앞선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기 쉽지만, 그는 10년 넘게 공부한 인류학을 버리는 것이 아까웠으며 결국 그 경험이 새로운 분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커리어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내가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인가"에 두었다. AI가 정답을 내놓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인간은 낯선 질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영역을 잇는 '연결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메시지다.

#백영재 #Sebasi Talk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 #맥킨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필립 모리스
문세영
하비이슈 · 경제 & 커리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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