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에서 오지 여행가로, 정선 산골 흙집이 간직한 70년의 시간
산골 흙집 앞마당에서 한 남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 '네팔'이라 불릴 만큼 험준한 산세와 물길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오지 덕산기 계곡. 이곳에는 잘나가던 연극배우에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오지 여행가가 된 최일순 씨가 살고 있다. EBS 다큐 영상에 따르면, 일순 씨는 친할머니의 생가터인 70년 된 흙집을 지키며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건네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70년 세월을 버텨온 흙집의 역사와 '코굴'
일순 씨가 머무는 흙집은 단순한 거처 그 이상이다. 70년 전 지어진 이 집의 벽면은 아궁이에서 올라온 연기가 검게 그을려 있다. 영상 속 출연자는 "70년 동안 불을 때니 연기가 올라가서 나무가 썩지 않고 지금까지 집이 유지될 수 있었다"며 집의 역사를 설명한다. 집 안에는 과거 산골 깊은 밤을 밝히던 유일한 불빛인 '코굴'도 남아 있다. 작은 코 모양을 닮은 이 구조물은 호롱이나 송진 등을 이용해 조명과 난방 효과를 동시에 냈던 산골의 지혜를 보여준다.
집을 유지하는 과정은 정성이 필요하다. 흙집은 해마다 새색시가 분단장을 하듯 황토로 단장해 주어야 한 해를 버텨낼 수 있는 귀한 몸이다. 일순 씨는 "할머니의 느낌과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음식들, 그리고 할머니가 직접 이 집을 수리하시는 모습들을 많이 봤다"며, 나이가 들수록 그 거칠지만 자연스러운 손맛과 할머니의 흔적이 그리워진다고 고백한다. 집 앞을 흐르는 계곡물은 그 자체로 천연 수영장이 되어준다.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담그면 삼복더위조차 잊게 만드는 산골만의 여유가 펼쳐진다.
독일 셰프 다리오를 울린 '외할머니의 레시피'
고향의 맛을 찾아 정선을 찾은 독일 출신 셰프 다리오에게 일순 씨는 혹독한 노동을 먼저 제안한다. 밥 한 끼 얻어먹으러 왔다가 직접 만든 햇빛 가리개를 기둥까지 세워 완성해야 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영상에서는 비가 새더라도 그냥 맞는 것보다는 덜 새도록 광목을 이용해 가리개를 만드는 과정이 담겼다. 흙집의 일을 돕고 난 뒤에야 비로소 기다리던 '밥상'이 차려진다. 일순 씨의 요리는 할머니의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이다. 그녀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해주시던 두부찌개의 맛을 잊지 않기 위해, 옆에서 요리 순서를 하나하나 외웠다고 회상한다.
비장의 레시피는 잘 익은 '육젓' 새우젓이다. 새벽부터 가마솥에 끓인 콩물로 만든 두부에 텃밭 채소를 곁들인 두부찌개, 그리고 매콤 짭조름한 두부 두루치기가 상을 채운다. 다리오는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며, 맛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할머니가 아른거리는 듯한 그리움을 느낀다. 여기에 에티오피아 원두로 직접 내린 커피까지 더해지며 산골의 밤은 깊어간다. 흐르는 계곡물과 새 소리를 배경 삼아 마시는 커피는 진정한 신선놀음과 같다.
인생의 쓴맛 뒤에 찾아오는 단맛, '짜글이'
일순 씨에게 이 흙집은 인생의 쓴맛 뒤에 만난 단맛이다. 험난한 오지 생활과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그녀는 자연스러운 손맛과 할머니의 온기를 지키며 살아왔다. 다리오는 자신이 어머니의 나라(에티오피아)에서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충주 할머니의 손맛을 재현한 '짜글이'를 선보이며 여행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이 소리가, 이 냄새가 애를 태웠다"는 다리오의 말처럼, 산골의 자연 맛과 추억의 분위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영상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이 교차하는 산골의 풍경을 통해,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는 '그리운 맛' 하나쯤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햇빛 가리개 아래에서 맛보는 그 맛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지나온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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