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앞 참수형까지, 영조가 '술'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이유
정장을 입은 남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다.
숭례문 앞, 차가운 칼날이 휘둘러진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가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남병사 윤구연의 목이 떨어진다. 죄목은 술을 마셨다는 것. 단순한 음주를 넘어, 영조의 눈앞에서 효시(梟示)까지 행해진 이 사건은 조선 시대 금주령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기록된다. 왜 영조는 술 한 잔에 이토록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둘러야 했을까.
"마시면 죽는다" 경고를 담은 옥잔, 해호배(解毫杯)
술을 경계하라는 영조의 의지는 왕실의 의례와 기물에도 투영되어 있었다. KBS 다큐 영상에 따르면, 영조의 열 번째 딸인 화유옹주의 무덤에서 출토된 희귀한 옥잔에는 기묘한 장식이 달려 있다. 바로 물에 닿으면 즉시 죽는다는 도마뱀의 일종, '가로(해호)'를 형상화한 것이다.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가로를 '가로배' 또는 '해어배'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술잔은 세종실록 도설에도 등장하며, 왕실 행사나 승정원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해호배'라 불리는 이 술잔은 사죄하는 신하들에게 술을 내릴 때 사용되기도 했다. 영상 속 출연자는 "술을 마시면 죽는다라는 의미를 담아, 항상 긴장하고 지나친 과음을 경계하라는 뜻을 담아 해호배를 하사했다"고 설명한다. 술잔 하나에도 엄격한 절제와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던 조선 왕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10년 먹을 쌀이 1년 만에 술로" 영조의 경제적 결단
영조가 금주령을 강력하게 밀어붙인 배경에는 '쌀'이라는 국가적 자원이 있었다. 조선의 술은 대부분 쌀을 주재료로 빚어졌다. 당시 쌀은 국가의 근간이자 백성의 생존과 직결된 핵심 요소였다. 실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두고 "10년 동안 먹을 쌀이 1년 만에 술로 쓰인다"고 지적할 정도로 곡물 소비가 극심했다. 중종 때에는 가게에서 파는 누룩으로 술을 빚는 데 쓰인 쌀의 양이 천여 석에 달했을 정도였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면 왕은 금주령을 내려 쌀을 아끼고자 했다. 영조는 한발 더 나아가 술의 원료가 되는 누룩을 파는 '국자전'까지 폐지하며 술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누룩이 없으면 술을 빚을 수 없다는 점을 정확히 꿰뚫은 조치였다. 전통 방식의 누룩은 통밀 반죽을 발로 200번씩 밟아 만드는 과정을 거치는데, 영조는 이러한 누룩의 유통부터 막아 술의 근원을 차단하고자 했다. 술을 단순한 기호품이 아닌, 나라의 식량을 축내는 문제로 인식했던 영조의 통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선비의 정신과 교류를 잇는 매개체, 술
국가가 술을 엄격히 통제했다면, 사대부 사회에서 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녔다. 안동의 종가와 같은 선비들의 공간에서 술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필수적인 연결고리였다. 보물로 지정된 '수운잡방'에는 122가지의 조리법이 담겨 있는데, 그중 절반가량이 술 제조법일 정도로 술은 사대부 문화의 핵심이었다. 이 책은 16세기와 17세기 전반에 걸쳐 작성되었으며, 당시 사대부들이 향락이나 지방 사회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데 술을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오정주'와 같은 약주는 머리카락을 검게 만들어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다. 황정, 천문동, 백출, 구기자, 솔잎 등이 들어가는 맑은 청주인 오정주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약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영상에서는 설월당 15대 종부 김도지가 수운잡방의 제조법 그대로 누룩가루, 쌀가루, 약재를 달인 물을 섞어 밑술을 채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퇴계 이황은 이곳 술독에 술이 항상 넘쳐났다고 기록했을 만큼, 술은 집안의 자랑이자 전수되어야 할 중요한 기술이었다. 국가에게는 통제의 대상이었던 술이, 향촌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선비 정신을 나누는 중요한 매개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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