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아버지 장례식 불참, 효를 중시하던 조선에서 일어난 '불륜' 같은 사건
흥선대원군의 죽음 앞에서도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던 고종의 이례적인 행보와 두 부자 사이의 깊은 갈등을 다룬다.
조선 시대는 효를 최우선 가치로 삼던 사회였다. 하지만 19세기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죽음 앞에서도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던 사건은 당시 사회적 맥락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로 기록되어 있다. 2013년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흥선대원군과 고종, 두 인물 사이의 깊은 갈등과 그 배경을 다루었다.
"아버지를 보지 못한 죽음", 고종이 장례식을 외면한 배경
흥선대원군(본명 이하응)은 생의 마지막 순간 아들인 고종을 만나고자 했으나 결국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황현의 기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죽기 직전 아들을 보지 못했던 애틋한 심정을 남겼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아버지의 문상을 외면한 고종이 당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출연진은 조선의 국왕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효를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례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부자 관계의 단절은 조선 왕실의 역사적 사례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다. 태조와 태종의 갈등 사례와 비교했을 때, 태종은 여론을 의식해 사신을 보내며 아버지를 모시려 노력했고 결국 태조는 태종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 반면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화해하지 못한 채 어긋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 차이점으로 꼽혔다.
살아있는 대원군의 등장과 운현궁의 권력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 상황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왕으로 세운 뒤 섭정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역사상 다른 대원군들은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살아있는 대원군'으로서 왕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은 당시 궁궐보다 큰 위세를 자랑하는 공간이었다.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등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특히 그는 신변 안전을 위해 운현궁에 많은 문을 만들어 두었으며, 왕궁인 창덕궁으로 곧바로 드나들 수 있는 전용문을 마련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또한 그는 대군의 예법인 '팔인열' 가마 대신, 정승급이 타는 '사인열' 가마를 선택함으로써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분석이 제시되었다.
고종의 습관과 시대적 상황
영상에서는 고종의 개인적인 습관과 당시의 정치적 사건들도 언급되었다. 고종은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가 고종을 비몽사몽한 상태로 만들어 정변을 실행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고종은 12세에 즉위하여 파란만장한 시대를 지나온 인물로 묘사되었다.
대원군은 재임 기간 동안 서원 정리 사업을 통해 당쟁의 원인을 제거하려 했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키는 등 세도 정치를 타파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또한 농민들을 위해 사창제를 설치하여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는 등 민생 문제에도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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