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반령 도깨비가 내려온다"…조선시대 현감 행렬이 재현된 충북 보은의 밤
얼굴에 문양을 그린 아이들과 이를 도와주는 여성이 실내에 있다.
조용하던 충북 보은군 회인면의 밤이 청사초롱 불빛과 함께 깨어났다. 마을 곳곳에 숨어있던 조선시대의 흔적들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전설 속 도깨비들이 나타나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펼쳐졌다.
KBS 다큐공작소의 영상에 따르면, 지난 9월 11일부터 보은 회인면에서 '보은 회인 국가유산 야행'이 열렸다. 이번 행사는 조선시대 회인현이었던 이곳의 역사적 자산과 '피반령 도깨비' 설화를 결합해 기획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준비한 이번 축제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 무대로 변모했다.
현감의 행차부터 망궐례까지, 되살아난 조선의 시간
축제의 서막은 화려한 현감 행렬이 열었다. 과거 회인현의 수장이었던 현감이 행차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 이 행렬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어지는 프로그램으로는 인산객사에서 진행된 '망궐례' 의식이 있었다. 망궐례는 조선시대 이곳 인산객사에서 인근의 왕에게 예를 올렸던 의식으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행사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휘황찬란한 조명이 비치는 인산객사에서는 퓨전 국악 무대가 펼쳐졌고, 도깨비들의 댄스 공연이 이어지며 회인의 밤을 들썩이게 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마치 조선 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라며 "체험하기 힘든 내용을 이렇게 볼 수 있어 너무 좋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방문객은 한복을 입고 축제를 즐기며 "신기하고 재밌다"고 말했다.
이번 야행을 준비한 관계자는 "회인은 조선시대부터 현감이 존재하던 작은 마을로 문화유산이 상당히 많다"며 "걸어서 갈 수 있는 문화유산들을 활용해 마을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활성화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기획 배경을 밝혔다.
"무섭지 않아요" 피반령 도깨비와 함께 걷는 골목길
이번 야행의 독특한 점은 '도깨비'라는 친근한 캐릭터의 활용이다. 피반령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즐겁게 놀았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축제 현장에는 귀여운 도깨비 분장을 한 이들이 가득했다. 도깨비 분장실에서는 어린이들이 도깨비로 변신해 축제의 주인공이 되어 즐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현장의 도깨비들은 "무서운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도깨비"라며 친근함을 더했다.
도깨비와 함께 걷는 마을 골목은 그 자체로 박물관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옥과 옛 돌담이 잘 보존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울에서 내려온 현감이 숙소로 사용했던 '회인 동원 내아' 같은 국가유산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눈을 감고 5초를 맞추는 '시간 맞추기 놀이' 같은 도깨비 놀잇감들이 숨겨져 있어 방문객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선사했다. 방문객들은 스탬프를 찍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마을의 아름다운 야경과 골목길을 만끽했다.
사라져가는 전통을 잇는 장인들의 손길
축제의 한 축은 보은의 무형유산을 지키는 장인들이 담당했다. 불에 달군 인두로 종이에 산수화를 그리는 낙화 장인의 시연은 관람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보은에는 다섯 분의 무형유산 선생님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번 야행을 통해 전통이 사라지지 않도록 체험과 전시를 이어갔다.
현장의 한 관계자는 "우리 보은은 무형유산 선생님들이 계신 곳"이라며 "전통이 자꾸 사라져 가는데, 이렇게 직접 체험하고 전시하면 어린이들을 비롯한 관람객들이 신기해하고 좋아한다"고 전했다. 마을의 역사적 공간을 활용해 현대인과 소통하는 장을 만든 이번 야행은, 죽어있는 문화재가 아닌 살아있는 마을 축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전체 주민이 동의하고 함께 준비한 이번 행사는 마을 곳곳의 역사적 공간을 현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달빛 아래 회인의 옛 이야기와 문화유산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던 이번 야행은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