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0억 달러 수주의 그늘, 구두 지시와 '노예 계약'에 갇힌 중소 협력사들
야외에서 안경을 쓴 남성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대한민국 건설업계의 해외 수주 누적액은 6,8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680조 원에 달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 건설 붐은 국내 경기 부진을 타개할 성장 동력이었으나, 그 거대한 외형적 성장 이면에는 대형 건설사와 중소 협력업체 간의 불평등한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KBS 다큐 영상에 따르면, 해외 현장에서 활동하는 중소 협력업체들은 원사업자의 불공정 계약과 법적 보호의 부재로 인해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말로만 시키고 대금은 미정산"... 구두 지시와 불공정 계약의 실태
해외 건설 현장에서는 서면 계약 대신 구두로 추가 공사를 지시한 뒤, 공사가 완료되면 비용 지급을 거부하거나 미루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화력 발전소 건설 현장에 참여했던 SM 종합개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영상 속 출연자는 삼성물산의 협력업체로서 전기 배관 공사를 진행했으나, 공사 과정에서 선행 공정의 지연으로 인해 인력과 장비 투입이 늘어났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 측은 추가 작업에 대해 구두로만 지시를 내렸으며, 비용 정산에 대한 명확한 협의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협력업체 측은 적자를 감당하기 위해 영수증 처리를 요청했으나, 원사업자인 삼성물산은 내역을 신뢰할 수 없다며 비용의 일부만 결제했다. 특히 공사 완공을 불과 2주 앞둔 시점에 삼성물산은 계약 해지를 통보했으며, 이 과정에서 계약이행 보증금 24억여 원을 회수했다. 협력업체는 약 100억 원 규모의 추가 공사 대금을 요구하고 있지만, 원사업자 측은 오히려 협력업체가 입힌 손해를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협력업체 관계자는 "그것은 저희가 죽으라는 소리"라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또 다른 업체인 정풍개발 역시 중간에 공사를 포기한 뒤 20개월 동안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미정산 금액은 190억 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상에 등장한 계약서 내용에 따르면, 추가 공사 비용 산정 권한이 원사업자에게 집중되어 있고, 공사 지연에 따른 비용 부담 역시 협력업체가 떠안도록 설계되어 있어 사실상 '노예 계약'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구조다.
해외 현지 법인이라는 이유로... 국내 하도급법의 '사각지대'
중소 협력업체들이 이러한 불공정 계약에 저항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법적 보호망의 부재에 있다. 국내 하도급법은 국내 기업 간의 거래를 보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해외 건설 현장의 경우, 계약 주체가 해외 현지 법인인 경우가 많아 국내 하도급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해외 건설 현장의 불공정 거래를 막기 위해 '건설 하도급 표준 계약서'를 제정하고 서면 발급과 실비 정산을 권고하고 있으나, 이는 강제성이 없는 권고사항에 불과하다.
실제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물산과 협력업체 간의 계약에 대해 불공정 계약이라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 당사자들이 해외 법인 자격으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국내 하도급법을 통한 법적 제재를 가하기는 어렵다는 한계를 밝혔다. 이러한 법적 공백은 중소기업들이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도 다음 공사 수주를 위해 억울한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이 된다.
직불 동의서까지 받았지만... 엇갈리는 책임과 책임 회피
대금 지급을 둘러싼 책임 회피 문제도 심각하다. 말레이시아 공사 현장에 참여했던 재하청업체 KNHI는 CJ건설의 협력업체인 WGL과 계약을 맺었으나, 18억여 원의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KNHI 측은 원사업자인 CJ건설이 직접 대금을 지불하겠다며 '직불 동의서'를 요구했으나, 결국 CJ건설은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CJ건설 측은 중간 업체인 WGL과 연락이 닿지 않아 지급이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정작 WGL 측은 CJ건설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해 결제를 못 해주고 있다며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국내 하도급법상 원사업자가 재하청업체에 대금을 직접 지불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존재하지만, 이 역시 해당 업체가 '제조업'으로 분류되느냐 '건설업'으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적용 여부가 갈린다. 건설업으로 분류될 경우 법적 강제력을 행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금을 받지 못한 협력업체들은 법적 분쟁 속에서도 속수무책으로 고사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결론: 제도적 보완과 법 개정의 시급성
해외 건설 시장의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그 성장의 과실이 중소 협력업체까지 전달되지 못하는 이유는 불공정한 계약 관행과 이를 규제할 법적 장치의 미비 때문이다. 투명한 서면 계약 체결과 조속한 분쟁 해결을 골자로 한 법 개정안이 국회에 머물러 있는 사이, 해외 현장의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법적 사각지대에서 '대금 미정산'이라는 생존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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